▶ 부산 영도구 대평동에만 있는 그 이름, ‘깡깡이 아지매’
부산 영도구 대평동은 선박들의 종합병원이다. 조선업이 불황이라는 요즘도 매년 3월부터 정기검사와 수리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선박으로 대평동은 활기를 띤다. 1912년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조선업의 산실이 되었던 대평동. 선주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대평동을 찾아오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못 구하는 부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대평동에만 있는 깡깡이 아지매 때문이기도 하다. 1년간 바다를 누빈 선박은 수리조선소에서 종합 검진을 받는 동시에 묵은 때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깡깡이 아지매는 선박의 외관에 페인트를 새로 칠하기 전, 바닷물에 녹슬어 부식된 외관을 깨끗하게 파내어주는 역할을 한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이 흘러들었던 영도에서 깡깡이 작업은 특별한 기술이 없는 여자들에게도 열려 있는 일당 좋은 일자리였다. 아지매들은 3kg의 깡깡 망치로 선박을 두드리며 가난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 “시어머니 따라 다니며 일 배워서 지금껏 써 먹지” - 깡깡이 인생 40년 전순남 아지매
올해 71세인 전순남 씨는 40년 경력의 깡깡이 아지매다.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 왔지만, 원양어선을 타는 남편은 2년에 한 번 집에 왔고, 전순남 씨는 딸 셋을 홀로 키우며 사실상 집안의 가장으로 살았다. 전순남 씨가 나이 서른에 깡깡 망치를 잡은 건 당시 깡깡이 반장으로 일하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를 돕고자 손에 든 망치를 40년 동안 들게 될 줄은 몰랐다는 아지매. 작업현장이 험해 손가락 두 개를 잃을 뻔한 사고도 겪었지만, 아지매는 구슬땀 흘려 번 돈으로 세 딸 모두 시집 보낼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깡깡이 아지매로 살 거야” - 은퇴한 깡깡이 이상희 아지매
수리조선업이 호황이던 1970년대, 대평동은 부산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할 정도로 돈이 돌았단다.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수리조선소 앞에는 매일 아침 깡깡이를 하려고 줄을 서는 아지매들로 늘 붐볐다. 지금도 대평동 뒷골목에서는 그 시절을 기억하는 아지매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에서 만난 이상희 씨는 상이용사로 변변한 직업이 없는 남편 대신 깡깡이 망치를 들었던 1세대 깡깡이 아지매다. 5미터 높이의 선박에 족장을 걸고 올라 앉아 선박을 두드려야 했던 그 시절, 이상희 씨는 족장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 오른쪽 발목을 다쳐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해 깡깡이 아지매로 살아온 그 시절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
▶ “내 뒤를 이어 깡깡이 하는 우리 막둥이, 기특하지”
- 깡깡이 모녀 임옥연, 한해숙 아지매
최소 경력이 25년 이상, 6~70대인 깡깡이 아지매들 사이에 지난해 풋내 나는 신참 하나가 들어왔다. 올해 마흔 여섯인 한혜숙 씨는 지난해 어머니를 따라 깡깡이 아지매가 됐다. 혜숙 씨 어머니 임옥연 씨는 남편 노름빚 갚고 1남3녀를 건사하느라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큰 딸을 시집보내고 깡깡 망치를 든 게 벌써 25년 째. 무릎 관절 수술도 미루고 진통제를 먹어가며 깡깡이 일을 하는 임옥연 씨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자식들 물려주고 갈 생각에 오늘도 그라인더를 잡고 뱃전에 선다. 혜숙 씨는 그런 어머니가 하루라도 더 빨리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깡깡이 아지매가 됐다.
▶ 수리조선업의 1번지, 대평동에서 만난 억척스런 어머니의 표상
한 때 대평동에는 200여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활동했지만, 지금은 50여명 정도만 남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리조선업의 1번지, 부산 영도구 대평동에서 억척스런 어머니들의 표상인 깡깡이 아지매들을 만난다.
뉴스출처 :[ KBS 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