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솔루션, 브레인기자] 진도군 최초 학예연구사 출신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진도 축제식 상장례 민속의 연희성과 스토리텔링(2008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미경 박사는 2020년 1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강강술래 진도 명인 ? 최소심 예인의 삶과 예술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초기 강강술래 예능보유자 양홍도 예인과 최소심 예인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녀들의 깊은 인연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김미경 박사는 1966년, 진도에서 최초로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양홍도 예인에 대해 “양홍도 예인은 1971년 작고할 당시 그녀의 죽음에 대해 ‘가난과 病魔에 시달리다 간 人間文化財’, ‘날품팔이하는 人間文化財’로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힘들게 살다 간 것으로”보인다고 서술했으며 “양홍도 예인은 ‘독특한 창법과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분으로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허술한 초가 2칸의 돌담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인생은 매우 고난스러웠는데 그래서인지 자료마다 출생연도는 물론 출생지와 이름의 한자가 다른 경우가 많다. 추측컨대 1900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출생하고 1971년,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서 사망한 것으로”보인다고 말한다.
한편, 김미경 박사는 1976년, 진도에서 두 번째로 강강술래 예능보유자가 된 최소심 예인에 대해 “최소심, 그녀는 진정한 강강술래의 계승자로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몸소 보여 준 그대로를 배우고 익힌 세대를 아우르는 강강술래의 진짜 명인이다. 그저 춤과 음악이 마냥 좋은 그녀였다. 최소심,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는 강강술래 예능보유자로 최초로 지정된 양홍도도 만나고, ‘면장님’으로 기세등등하게 말 타고 진도를 누비고 다닌 멋진 서방님도 모셨던 녹진 시절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 당시 나이도 서른 전후로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할 시기였다. 이때 최소심의 예인적 기질도 최고조에 달해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 김미경 박사는 강강술래 진도 명인 ? 최소심 예인에 대해 마지막 결론으로 “나는 최소심이라는 예인을 보면서 결혼을 몇 번 했든 술집을 걸지게 했든 함바집을 갈팡지게 했든 그건 그녀의 예술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예술인은 그냥 예술인일 뿐이다. 사람들의 평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인이다. 귀가 얇아 이리저리 갈대처럼 나부끼면 진정한 예술혼은 바람 따라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린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미경 박사는 이 책의 마지막 챕터 - “강강술래 진도 명인 최소심 때문에 꿈꾸는 꿈 이야기”에서 세계무형유산 걸작인 강강술래를 앞세워 강강술래 공연장(군내 녹진), 역사의 바다 체험장(고군 벽파), 강강술래 체험관(군내 둔전), 정유재란순절묘역정비사업(고군 도평), 왜덕산묘역정비사업, 왜덕산 참배탑 (고군 내동), 금갑진성 복원 및 사구미연대 복원 사업(의신 금갑) 등 명량대첩 승전 현창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문화유산 걸작인 강강술래가 세계를 대표하는 공연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성공으로 진도가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김미경 박사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보도자료출처: 전라남도 진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