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원장 조현재)은 최근 한국학 자료를 조사하면서 북한 개성에 소재한 표충비 관련 조선시대 계회도 형식의 자료를 발굴했다. 고려 충신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이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의 귀중본이다. 현재 표충비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알려진 선죽교의 서편에 위치하며 북한의 국보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는 곳이다.
1740년 가을 영조대왕은 목청전을 찾아 개성에 행차하였다. 목청전은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많이 찾아 분향하던 곳이다. 당시 영조 대왕은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하기 위해 선죽교 다리에 어가를 멈추고, 정몽주를 찬미하는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영조실록』에도 1740년 9월 3일, 선죽교에 이르러 포은 선생의 절개를 기리고 성균관에 들러 선현들을 참배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 영조대왕은 자신이 쓴 글씨를 개성유수 김약로로 하여금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이번에 발굴된 어제어필 시문은 고성이씨 문중에서 누대에 걸쳐 세전해 오던 것으로, 당시에 작성된 원본에 준하는 기록유산으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1740년에 세운 표충비는 일명 ‘어제어필 선죽교 시비’라고도 한다.‘어제어필’은 임금이 직접 시를 짓고 썼다는 말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자료는 우측 첫 행에 세로로 ‘어제어필선죽교시(御製御筆善竹橋詩)’라는 제목이 씌어져 있으며, 그 위에는 전서체로 ‘영종어필(英宗御筆)’ 4글자가 적혀 있다. 둘째 행에는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찬미하는 14자의 해서체 시(詩)가 있으며, 이어서 시를 짓게 된 내력을 적은 짤막한 설명의 소지(小識)가 7행에 걸쳐 있다. 좌측 마지막 행에는 숭정 기원 후 113년 되는, 즉 1740년에 비를 세운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측근에서 왕을 모시는 시종신으로서 당시 영조를 시종하던 고급 관료들의 명단 및 비석을 건립한 주체가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직접 지은 14자의 시구는 “도덕과 충정이 만고에 뻗치니(道德精忠亘萬古), 높은 절개가 태산북두처럼 우뚝하다(泰山高節圃隱公)”는 내용이다. 소지에는 포은 정몽주의 도덕성과 충성심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이를 표창하고자 하는 영조의 의지가 담겨있다. 또한 영조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숙종 같은 역대 왕의 성대한 뜻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기록했다. 자료의 하단에는 시종신으로 영조를 수행한 도승지 민형수를 비롯해 문신 12인의 관직과 성명이 실려 있다. 말미에는 당시 개성 유수로 있던 김약로(1694~1753)가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우고 비각을 세운다고 적었다. 또한 대제학 오원에게 명하여 그 비석의 음기를 짓도록 하였으며, 비문은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인 최천약에게 새기게 하였다.
이번에 발굴된 〈어제어필 선죽교시〉는 바로 표충비에 적힌 그대로의 내용으로 건립 당시에 작성된 원본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의 글씨가 국내에 다소 전하고 있지만 이처럼 당시 원본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자료는 극히 드물다. 더구나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충절의 화신 정몽주와 관련된 자료이기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어필로서 자료의 형식이 18세기에 유행하던 계회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도 매우 주목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자료부장은 “포은 선생은 비록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불사이군의 정신은 권력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찬양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가 된다.”고 설명했다.
뉴스출처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