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3년 6월 30일에 중국 연변의 나자구(羅子溝)에서 조선 회령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거둔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이 유명하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되어 장군은 총사령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하였으며,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 정계에서 활약하던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