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6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어느새 1000일이 됐습니다.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과 저의 첫 만남도 벌써 12년째네요. 세월 무상합니다.
2000년의 어느 토요일 오전 8시 10분, 노 장관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장관 취임 때 뵌 후 개인적인 첫 만남이었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국장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던 저에게 노 장관께서 총무과장을 맡기실 것이라는 언질을 하루 전에 받고 왔기 때문입니다. 노 장관은 집요하셨고, 저도 집요했습니다.
하지만 ‘승부사’ 노무현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저는 “인사라인에 고대 출신이 편중된다” 등 세 가지 사유를 들어가면서 ‘총무과장 불가론’을 펼쳤지만, 노 장관께서는 “적절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셨고, 제가 거듭 거부하자 홍승용 차관을 불러 질책하기도 하셨습니다. 결국 제가 졌죠. 총무과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 장관께서는 당시 △온라인상에서 업무처리와 지식관리가 가능한 시스템 구축을 추진할 사람 △직원들이 직무와 연관된 학습활동을 함으로써 조직혁신을 추진할 사람 △형식적 회의체계를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회의로 변모하도록 추진할 사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공정한 인사시스템을 구축할 적임자를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에 넘치게도 저를 지명하셨습니다. 저는 퇴근길에 대형서점에 들러 ‘혁신’ ‘학습’ 관련서적 21권을 사들고 집에 왔고, 다음날 하루 종일 이 책들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노 장관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계획에 대한 추진계획안을 3페이지로 요약해서 보고했고, 그렇게 해수부의 혁신이 시작됐습니다.
이후로 저는 ‘노무현의 브레인’이라는 과분한 별명을 얻었고, 대선 승리 이후 인수위원회를 시작으로 참여정부 내내 노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국정상황실장과 인사수석으로 청와대에서 5년간 생활하면서 제가 사용한 휴가는 이틀하고 반나절뿐이었지만, 저를 알아주시는 그분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할 수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인사수석 시절엔 그동안 소외된 인천출신 인재를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괜히 겸연쩍어하는 저에게 노 대통령께서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아직까지 지역균형을 생각하면 인천사람들을 더 등용해야 합니다”하시며 빙긋이 웃어주셨습니다. 어떻게 제 속마음을 그렇게 잘 헤아리시는지 그때마다 감사할 따름이었죠.
이후 청와대를 나온 저는 18대 총선에 인천 중·동·옹진에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본선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경선에서 떨어졌습니다. 머리도 식힐 겸 미국에 가기로 했고, 출국에 앞서 퇴임 후 봉하마을에 귀향해서 생활하셨던 노 전 대통령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시 ‘서민’ 노무현의 인기가 한창 하늘을 찌르던 때였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노 전 대통령께서는 저희 딸들에게 “내가 너희 아버지에게 참 많은 신세를 졌단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대신 너희들한테 선물을 줄게”하시며 내실을 공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치질을 하시면서 “이런 모습을 공개하는 것도 처음”이라고 하셨고, 그 장면은 저희 딸들의 휴대폰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후 몇 번이나 궁금해 하는 분들께 ‘노무현의 양치질’ 사진을 공개하고 싶었는데, 제 딸 녀석들은 고집불통입니다. 뭐 자기들만의 추억으로 남겨두겠다나. 아무튼 절대 사진을 못 내놓겠답니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선물이 특별하긴 특별한가 보네요.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또 터졌죠.
그날도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북적였고, 시간이 흐르자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또 마실 나갈 시간이네”하시며 저한테 같이 나가자고 하셨고, 저도 얼떨결에 따라나섰습니다. 신발을 신고 사저를 나서니 저쪽 편에 많은 분들이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특유의 구수한 말솜씨로 방문객들을 맞으셨고, 방문객들도 웃음꽃을 피우며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께서 갑자기 저를 앞으로 부르셨습니다. 순간 방문객들의 눈길이 저에게 쏠렸고, 앞으로 나온 저를 가리키시며 노 전 대통령께서는 “여러분, 혹시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라는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보자 노 전 대통령께서는 “이 사람은 박남춘이라는 분인데 청와대에서 인사수석을 하셨고, 해수부장관 시절부터 저를 많이 도와준 사람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방문객들께서 “와~”하며 고개를 끄덕이시던 찰나에 노 전 대통령께서 한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결국 주변에서 ‘빵’하고 터지고 말았죠.
“그런데요, 이 사람이 얼마 전에 끝난 국회의원선거에 나갔는데, 본선에도 가지 못하고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예선탈락한 사람이죠.” 방문객들은 박장대소하며 박수를 쳤고, 저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비록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지만 너무 유쾌한 시간이었고, 경선 탈락이 남긴 부담감을 한 번에 씻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네요.
이후 저는 미국에 갔고, 생전에 그분을 다시 뵙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하지만 언제나 웃으셨고, 국민이 웃길 바라셨던 그 마음을 생각하면 슬픔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국민 앞에서 늘 유쾌하셨던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 남겨진 저희들의 몫일 겝니다.
바다는 박남춘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노무현은 박남춘의 정신입니다.
언제나 제 마음을 헤아려주셨던 그분. 지금까지 제 마음을 바친 대상은 제 고향 인천과 노무현 대통령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인천 앞바다가 저에게 호연지기와 열정을 가르쳐줬다면 노 대통령께서는 저에게 원칙과 소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이 몸을 던져 구하고자 하셨던 대한민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